시우
떠나고 남은 것들
Published
Apr 13, 2025
Topic
novels
공항철도 열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석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네, 네, 하는 목소리만 낮게 들렸다. 기정은 그런 석을 힐끗 쳐다보았다가 다시 태블릿으로 눈을 돌렸다. 시간 때우기 용으로 드라마라도 볼까 싶어 왓챠를 열었는데 역에 음악 소리와 함께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지금, 인천공항2터미널. 인천공항2터미널행. 일반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기정은 태블릿 화면을 끄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석은 언제 통화를 끝냈는지 어느새 기정의 캐리어를 끌고 스크린도어 쪽으로 걸어가면서 기정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기정은 빠르게 다가가 석의 옆에 섰다. 저만치에서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열차는 빠르게 기정과 석의 눈앞을 지나쳤고 천천히 느려졌다. 열차는 제자리에 멈춘 후 문을 열어 주었다. ‘발 빠진 쥐. 발 빠진 쥐.’ 하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
역에서 내려 10분 정도 걷자 건물 앞에 놓인 작은 칠판 입간판이 보였다. 기정이 다니는 학교 근처 작은 대여 공간이었다. 예술 모임에서 모은 회비로 모임 사람들과 그 지인들끼리 작은 전시 겸 연말 파티를 연다고 했다. 석은 기정이 쥐여 준 꼬깃꼬깃한 티켓을 펼쳐 보았다. 수려한 손글씨로 휘갈겨 쓴 영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많지 않아 티켓도 전부 수작업으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의도된 건지 몇몇 철자의 획 끝에 잉크가 조금씩 번져 있었다. 생각해 봐야 알 수 없을 것들을 티켓째 대충 구겨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어차피 저 아래에 그들이 있을 터였다. 기정도 함께 있을 것이었다.
유리문을 열고 건물 안에 들어서자 순식간에 안경에 김이 서렸다. 석은 인상을 찌푸린 채 벽을 더듬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중간에 갑자기 낮아진 천장에 머리를 한 번 부딪혀 허리를 굽혀야 했다. 지하 전시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안에서 기정이 나왔다. 기정의 첫 말이 ‘왔어’ 같은 인사치레였는지 ‘너 또 천장에 머리 박았냐’ 비슷한 것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안에는 이미 열댓 명 정도가 각자 자유롭게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기 작품 앞에서, 누군가의 작품 앞에서, 중앙 테이블 앞에서, 초대한 지인과, 초면인 사람들끼리, 모임 사람들끼리. 회화, 설치 미술, 사진, 영화……. 공간 곳곳에 그런 시각 예술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중앙 테이블에는 각자 가져온 듯한 음식들과 술이 놓여 있었다. 저기 벽에는 기정이 그렸다는 그림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석이 만들고 기정이 가져왔다는 레몬 절임과 뱅쇼가 있었다. 저 뱅쇼 때문에 한동안 집에 달짝지근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 모든 곳에 석이 있었고 기정도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다들 중앙에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서로 간단한 소개라도 하자 그랬고 석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정이 대신 소개해 주었던 것 같기도 했다. 초대된 사람들 대부분은 초대한 사람과 애인이거나 친한 친구였고 기정도 아마 비슷하게 말한 듯했다.
자기소개 후에는 다시 서로 여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최근에 다녀온 어디 전시가 어땠다든지, 인디스페이스 상영작들이 어쨌다든지, 조만간 소호에서 이런 전시를 한다던데 같이 가자든지, 프랑스 유학을 가려고 C1을 준비하고 있다든지―. 그 사이에서 누군가 석에게 기정과 농구를 했다고 들었다고 물어 왔다. 가끔씩 기정의 그림에 등장하는 키 큰 남자가 너였구나, 하고 말을 거는 상대에게 적당히 답해 주며 끊기지 않을 정도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는 자기는 독립 영화를 한다고 말했다.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자유로운 영화를 한다고. 그래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있냐고 석이 묻자 그는 우리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우리’의 이야기라고 말하면서, 애인이라고 소개한 옆자리 사람을 슬며시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고는 미소 지은 얼굴인 채로 다시 석을 보았다. ‘우리’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석은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화장실은 저쪽에 있다며 가리킨 곳에는 문 2개가 마주 보고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남자 화장실이 없었다. ‘여자 화장실’이라고 적힌 문 맞은편에는 ‘성중립 화장실’이라고 적힌 종이 하나가 붙어 있었다. 줄곧 어딘가 얹힌 듯한 느낌이었다.
10시 5분 전쯤에 공간 관리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대여 시간이 10시까지라고 말하며 정리하는 시간이 초과되면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2시간 추가 요금을 결제하고 느긋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작품들을 떼어 냈다.
그날 헤어지기 전 석과 이야기를 하던 그가 몇 개월 후에 작게 자기가 만든 독립 영화 상영회를 한다며 시간이 되면 기정과 함께 보러 오라고 말했다. 그때 석은 애매한 긍정의 답을 했던 것 같았다.
결국 상영회는 무산되었다고 기정에게 전해 들었다. 팀 내 불화가 있었다는 듯했다. 어차피 그날은 기정과 강원도 여행을 가기로 했던 날이라 보러 가지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
뉴욕으로 유학을 가기로 한다는 기정의 말을 들은 날 석은 기정이 짐을 싸는 일을 도와주었다. 택배로 부칠 것들, 기내 수화물로 같이 보낼 것들, 캐리어에 넣을 중요한 것들을 나누어 차곡차곡 쌓아 넣으며 석은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공항에서 자신을 배웅하는 석에게 기정은 한 학기만 있다가 올 거라며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전에도 했던 말이었다. 석은 괜찮다며, 근데 다음에는 좀 더 빨리 말하고 공항버스도 미리 예매하고 하라고 잔소리를 했다. 기정의 항공편에 대해서 아직 탑승하지 않은 승객은 서둘러 탑승하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기정은 석과 잠깐, 짙게 포옹하고 탑승 게이트로 들어갔다. 석은 기정이 비행기에 탈 때까지, 기정이 탄 비행기가 공항에서 이륙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공항철도 열차에 몸을 싣고 석은 오늘 저녁에 뭘 먹을지 생각했다. 원래 오늘은 카레를 해 먹으려 했는데. 덜컹거리는 열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발 빠진 쥐. 발 빠진 쥐.’ 석은 발이 빠지지 않게 조심히, 손에 든 휴대전화를 떨어뜨리지 않게 꼭 쥐고 열차에서 내렸다.
집에 들어가자 현관 센서등이 밝게 켜졌다. 어두운 거실 벽을 더듬어 불을 켜자 집 전체가 환해졌다. 여전히 혼자 살기에는 넓고 둘이 살기에는 좁은 우리 자취방이었다. 어차피 다시 돌아올 테니 굳이 이사하지 말자고 기정이 말했다. 방에 들어가자 석의 짐들, 그리고 기정이 두고 간 물건들이 보였다. 석은 작은 책장에서 소설책 한 권을 꺼내 펼쳤다. 과제 때문에 필요한 곳까지만 읽고 더는 읽지 않았던 책이었다. 중간에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연필로 그린, 턱을 괸 채 책을 읽고 있는 석의 옆모습이 그려진 작은 종이였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주인공이 어떻게 된다 했었지. 석은 기억나지 않는 수업의 내용을 애써 떠올리는 걸 포기하고 그림 속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
그날 저녁에 석은 카레를 한 솥 가득 끓여 먹었다. 혼자 며칠을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한동안 집에 카레 냄새가 배겠다고 생각했다.